이종격투기 역사상 최고의 빅매치가 확정되던 날, 미르코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몇 번이고 성사되기 직전에 무산되어 버린 효도르와의 시합.
미르코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정말 길었다. 효도르와의 대결이 발표되었던 때가 2003년 11월이니, 거의 2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린 셈이다. 역시 노력하는 자에게 신께서는 그에 상응하는 기회를 주시는 것 같다.”

미르코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오랫동안(k-1 때부터) 그의 활약을 지켜봐온 분들이라면 다들 공감하실 것이다. 크로아티아의 시골마을 프리브라카에서 자라나 내전을 겪으며 강해져야한다는 일념으로 격투가가 되기로 결심한 미르코. 일본뿐만이 아닌 우리나라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그가 어떻게 종합격투기에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을까? 미르코가 프라이드로 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k-1 멜버른 대회에서 맥도날드에게 당한 패배였다.

“2001년 k-1 멜버른 대회때 맥도날드를 상대로 믿기지 않는 패배를 당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k-1 지역예선 1회전에서 패배한 나에게 월드 그랑프리의 출전권은 물 건너 가버린 셈이고, 당시 나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k-1에 데뷔한 후, 수많은 선수를 상대로 무차별 폭격을 퍼부어 승리를 거둔 그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패배를 안겨준 맥도날드와의 시합은 팬들에게나 그에게나 상당한 충격이었다. 지금도 가끔씩 팬들사이에서 나오는 얘기지만, 만약 그때 미르코가 맥도날드에게 패배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현재의 종합격투기의 역사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미르코 본인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잘 모르겠다. 만약 멜버른 대회에서 승리했다면, 토너먼트 결승에서 어네스트 후스트를 이겨야만 했을 것이고, 그렇게 됐다면, 12월 결승에 진출하였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됬다면 지금의 나는 입식격투기인 k-1만을 파고들었을지도 모른다. k-1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차게 되었을지도 모르겠고. 생각해보면, 운명이란건 참 불가사의한 것 같다. 만약 그렇게 됬다면, 프라이드의 헤비급 구도도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고, 마크 헌트도 프라이드에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미르코의 첫 종합격투기 시합은 후지타 가즈유키와의 대결이었다. 후지타는 영장류 최강의 사나이 마크 커를 격파한 뒤, 한창 주가를 올리던 괴력의 프로레슬러로 수많은 팬들은 후지타의 압도적인 승리를 예상했다.

“나도 시합의 당사자가 아닌 관객의 입장이었다면, 그와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웃음) 냉정히 생각해 봤을 때 나의 승리확률은 1%정도 밖에 안됐고, 그때 시합도 솔직히 말해 운이 좋았다.”

연습도 충분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 프라이드 헤비급의 톱클래스 선수를 상대로 링에 오른 미르코. 태클로 들어오는 후지타에게 본능적으로 무릎차기를 먹여 승리를 거둔 것도 그의 말처럼 운이 따랐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 운이란 것도 시합에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미르코는 말한다.

“슈퍼스타와 스타의 차이는 운이 따르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후지타전에서 운이 따라준 걸로 보아, 나에게도 슈퍼스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미르코는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갖게 된 시합으로 밥샵과의 시합을 꼽고 있다. 어네스트 후스트를 두 번이나 격파하고, 노게이라에게 지옥을 맛보여주는 등, 밥샵은 당시 격투계 최대의 이슈로 떠올랐다. 압도적인 괴력에 충격을 받은 일부 성급한 팬들은 밥샵최강론까지 제기할 정도로 밥샵의 등장은 격투계의 빅뱅 그 자체였다. 심지어 모 스포츠신문에서는 밥샵의 유전자구조와 고릴라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기사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런 밥샵을 미들킥에 이은 원투펀치로 울려버린 뒤, 미르코는 격투기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런 압도적인 파워로 밀고 들어오는 밥샵을 쓰러뜨린뒤, 나에게도 그만한 힘이 있다는 걸 자각하게 되었고, 그때 처음으로 나의 실력이 종합격투기에 통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히스히링과의 시합에서 승리를 거둔 뒤, 미르코는 프라이드의 최고봉에 오르려는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3년부터 종합격투기에 본격적으로 참전한 뒤, 히스히링과의 시합이 있었는데, 당시의 시합전개가 나의 구상대로 착착 맞아떨어졌고, 그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때부터 벨트를 손에 거머쥐는 것도 먼나라 얘기가 아닐 거란 확신이 들었다.”

당시의 프라이드 대회에서 히스히링 vs 미르코 전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엄청난 관심을 끌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상당수의 팬들은 택사스의 야생마이자, 프라이드 헤비급의 3강체제를 형성하고 있던 히스히링의 근소한 우세를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미르코는 철저히 스탠딩에서 싸우는 전법을 구사하여 야생마를 길들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회초리같이 달라붙는 미들킥에 이은 무차별 파운딩으로 승리를 거둔다.

“난 히스히링과의 대결에서 자신감 외에도 많은 수확을 얻게 되었다. 프라이드 룰로 치러지는 시합에선 시합전에 미리 상대를 분석하여 전략을 짜내는 것이 k-1보다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그 전략을 실행시키기 위해 마련한 나의 무기가 얼마만큼 상대에게 통용될지를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단 걸 실감하게 되었다.”

미르코는 히링과의 시합뒤에 자신의 실력이 프라이드의 톱클래스에게도 먹힌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심지어 효도르와의 대결까지 바라보았지만, 그의 매니저는 1-2시합을 더 치룬뒤에 생각하자며 만류했다.
그리고, 이고르 보브찬친과의 시합에서 미르코는 전매특허인  ‘보이지 않는’ 하이킥으로 이고르를 실신시켜 버린다. 훗날 이고르가 시합직후 자신이 어떻게 졌는지조차 몰랐다고 털어놓을 정도로 빠른 하이킥이였다. 그전까지 미르코의 실력에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던게 사실이나, 이 시합 한번으로 미르코는 프라이드 톱3의 반열에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올리게 된다.
그리고, 얼마 뒤 효도르와의 시합이 결정되었지만, 챔피언의 부상으로 인해 상대는 잠정챔피언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로 바뀌어 버린다. 당연히 미르코는 불같이 화를 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지금, 이 순간 효도르와의 타이틀매치가 성사되지 않았다면, 난 그에 대해 솔직한 심정(‘효도르가 도망갔다는)을 털어놓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지금 이렇게 정식으로 도전을 받아들여 준걸로 보아, 그는 그때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도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걸로 믿겠다. 그가 위대한 프라이드 헤비급 챔피언이란건 변함이 없고,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상대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선 파이터라면, 나를 포함하여, 누구라도 존경심을 품고 있다.”

노게이라와의 시합에서 미르코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나의 벨트는 준비됐느냐?’ 는 말로 넘치는 자신감을 드러냈지만, 결과는 암바로 인한 미르코의 패배로 끝났다. 종합격투기를 시작한 이후 첫 패배.
1라운드는 미르코의 우세였다. 그러나 2라운드에서 마운트를 뺏긴 뒤, 노게이라의 파운딩이 이어질 경우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키리라는 두려움에 빠진 미르코는 온 힘을 다해 노게이라를 퉁겨내지만...
노련한 주지추 매지션 노게이라는 그 상태에서 미르코의 팔을 붙잡아 완벽한 암바로 미르코에게 탭을 받아낸다.
이 시합이후로 미르코는 스탠딩에서 승부를 보려는 작전에 전면적인 수정을 가하게 된다.

근데, 이즈음 재미있는 사건이 발생한다.
노게이라와의 시합이 지난 얼마 뒤, 미르코는 다카야마와의 시합이 정해지는데, 이때 다카야마는 개껌을 씹어 턱을 단련시켜서라도 미르코의 하이킥을 견뎌내겠다고 공언을 하며 미르코에게 어서 빨리 덤비라는 도발을 한다. 참으로 프로레슬러다운 도발이었다. 다카야마에게 있어서 미르코와의 시합은 격투가로서의 경력을 쌓는데 더할나위없는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미르코는 부상 때문에 시합을 취소하고, 잔뜩 기대하던 다카야마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미르코에게 폭언을 퍼붓는다.

다카야마 - “미르코는 자신이 부상이 있어 시합을 못한다고 그러는데, 나를 포함하여 어떤 격투가라도 부상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진정한 격투가가 아니다. 당장 진단서를 띠어가지고 사과하러 오라!”

다른 상대를 대타로 붙여주겠다는 요구도 거부한 채, 다카야마는 미르코아니면 안싸우겠다며 대회에 불참을 선언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때부터이다.
다카야마의 이 말이 크로아티아에 있는 미르코의 귀에 그대로 들어간 것이다.(산케이스포츠에서 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불같은 성격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미르코는 이 말을 듣고 그야말로 펄펄 날뛰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타겟은 일시적으로 효도르가 아닌 다카야마를 향하게 된다. 미르코의 분노는 당시 그가 남긴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파이터라면 링위에서 모든 것을 증명해야 한다. 다카야마가 그렇게 원한다면, 그와 시합해 주겠다. 그 녀석의 입을 완전히 막아버리겠다.”

그리고, 마크커를 DDT로 이겼다고 주장했다 된통 당한 야마모토 요시히사를 상대로 무차별한 타격을 가하며 ko승을 거둔 미르코는 시합뒤 인터뷰에서 다시한번 다카야마를 겨냥하는 말을 한다.

“다카야마는 내가 도망갔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데, 곧 시합을 통해 그 녀석의 입을 막아버리겠다”

미르코는 그 말을 실현시키기 위해 프라이드 그랑프리를 통해 다카야마에게 도전의사를 전한 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다카야마는 미르코에게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하던 야마모토전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는지, 부상을 핑계로 시합을 거부한다. 측근을 통한 이런 변명 한마디와 함께. “미르코는 자기가 시합을 피해놓고서 이제와서 제멋대로 하려한다!”

어찌됐건, 승승장구하던 미르코에게 다시한번 시련이 닥친다.
그건 바로 랜들맨과의 시합이었다.
연전 연ko승으로 인한 자만심, 영화출연으로 인한 집중력 저하...
한마디로 미르코는 너무 방심하고 있던 것이다.
랜들맨은 미르코의 시합을 철저히 분석하여, 그가 하이킥을 내는 순간의 빈틈을 찾아내어 이에 대한 카운터를 날리는 연습을 수없이 반복한다.
반복된 연습의 결과는 시합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랜들맨은 미르코의 공격시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오른손카운터를 날렸고, 정신을 잃은 미르코에게 무자비한 파운딩을 먹여 그랑프리 최대의 이변을 연출해낸다.

“당시 국회의원 업무, 고이즈미 총리와의 만남 등으로 정신이 없었고, 2월에 있던 시합을 모두 ko로 이긴 것에 대한 자만심에 영화출연일까지 겹쳐졌으니... 그리고, 랜들맨과의 시합이 결정된 뒤 그와 사쿠라바와의 시합과 퀸튼과의 시합 비디오를 보고 별볼일 없는 선수로 여겼고....이런 여러 요인들로 인해 그와 같은 결과가 나온 것이다.”

랜들맨과의 패배뒤, 미르코는 가네하라 전, 오오야마 전, 에밀리아넨코 알렉산더 전을 모두 승리로 장식하며 다시 헤비급 정상을 향한 본 궤도에 오른다. 그리고, 조쉬바넷과의 시합이 특히 주목할 만 한데, 그것은 미르코가 시합을 앞두고 한 말 때문이다. 미르코는 시합전 효도르와 노게이라에게 “외부의 적은 나에게 맡기고, 너희들은 빨리 결판이나 지어라”는 말을 함으로 프라이드의 지킴이 역할을 자청한 것이다. 프라이드 데뷔초에 ‘침략자’라 불렸던 미르코가 이번엔 ‘외부의 적’을 몰아내는 지킴이 역할 자청한 것은, 그동안 미르코의 위치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때 나는 프라이드의 대표로서 ‘외부의 적’을 쫓아내는 역할이 주어진 것이라 믿고있다. 그리고 고조된 분위기의 대회장에서 반델레이의 팬이던, 노게이라의 팬이던 구분없이 모든 프라이드 팬들의 응원을 받았고, 그때의 멋진 기분은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내가 항상 ‘외부의 적’이었는데 말이다.”

조쉬바넷과의 대결은 바넷의 어깨탈골로 인해 맥빠진 시합이 되버리지만, 어쨌든 미르코는 챔피언으로의 길에 더욱 근접하게 다가선다.
뒤이은 랜들맨, 콜먼전에선 해머하우스의 장기인 총알 하단태클을 완벽히 방어해내는 디펜스실력을 과시하며 완승을 거둔다.

그리고, 마고메도프를 미들킥으로 쓰러뜨린뒤 다카다 총괄본부장의 발표로 전세계 격투기팬들이 고대하던 ‘효도르 vs 미르코’ 전이 정식 발표된다.
수많은 우여곡절과 루머 끝에 발표된 대결이라 미르코에겐 더욱 감회가 컸으리라.

대망의 ‘효도르 vs 미르코’ 전은 우리나라에 xtm으로 생중계되어 6%의 시청률을 넘기는 쾌거를 기록하였다.
이 시합에 대해선 수많은 전문가분들이 남기신 예리한 분석들이 있으니, 미숙한 필자는 이에 대한 분석을 생략하고자 한다.
단, 한가지 말하고 싶은 건 이 시합은 필자가 이제까지 보았던 이종격투기 시합을 통틀어 최고의 명승부였고, 이정도로 수준높은 시합은 다시 없으리라 생각한다.
어떠한 찬사를 붙여도 모자랄 만큼 긴장감 넘치는 명승부 중의 명승부였다.
당시 네이버 뉴스란의 1위부터 5위까지의 가장 많이 본 기사로 이 시합에 대한 기사가 등록되어 우리나라의 이종격투기에 대한 인기가 얼마나 높은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격투시합중 우리나라 선수가 아닌 외국선수들만의 시합으로 이렇게 화제를 모으는 건 어지간한 인기론 정말 힘들다.

이야기가 잠시 샛길로 빠졌지만, 미르코는 조만간 조쉬바넷과 대결을 벌인다고 한다. 패배할때마다 더 강해져온 미르코인 만큼 더욱 강해져서 언젠가 챔피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 본다.



ps. 미르코 크로캅의 패배후 효도르와 대적할 만한 선수로 조쉬바넷과 ufc의 알롭스키가 물망에 오르고 있는데, 개인적인 의견으론 알롭스키라면 효도르와 용호쌍박의 대결을 펼칠 수 있으리라 본다.